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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의 영역본을 둘러싼 피비어와 브롬필드의 논쟁에서
눈에 띈 대목 중 하나는 Ecco출판사의 "전쟁은 줄이고, 평화는 늘렸다. 그 결과 훨씬 더 재미있고...." 라는 부분이다. 이런 광고문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에 대해 그간 영미권 독자들은 "전쟁만 너무 많고, '평화'는 거의 없다"는 평을 내려왔다. 이런 선입견 사이에서 브롬필드 영역본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같은 광고가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소설을 두고 러시아의 독자들은 "전쟁은 거의 없다"는 평을 내린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떤 학생들은 "그리고 평화" 읽었냐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례프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으로 불린다)과 그 전쟁을 치루고 있는 러시아 귀족 사회를 그리고 있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전쟁의 진행 과정과 맞물려 흘러간다. 따라서 이 소설은 큰 축으로만 보면 전쟁 이전과 이후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전쟁'만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소설을 두고 영미권과 러시아권이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까.


"전쟁과 평화"의 원 제목은 "война и мир (vojna i mir)"다. 러시아어로 война (vojna)는 전쟁을, и (i)는 '그리고'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мир (mir)다. '미르'는 현대 러시아어에서 평화, 갈등 없음, 고요함 등의 의미와 세계, 세상, 지상, 인간 사회, 집단 등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мир миру (mir miru ; 세계에 평화를) 같은 말장난이 한 개의 단어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인에게 있어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은 '전쟁과 세계' '전쟁과 (인간) 세상' 등등의 의미까지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단어 '미르' 대신에 그 자리에 peace 나 평화가 들어가있는 번역 제목을 접하는 외국인에게 이것은 '평화'를 의미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큰 축을 기본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소설이긴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 그들의 사상, 작가의 사상 등을 보며 러시아인들이 갖게되는 "전쟁과 '미르'"에는 '미르'만 가득하다는 생각을, '전쟁과 평화'를 읽는 외국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러시아어 단어 '미르'가 이 두가지 뜻을 동시에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례프 똘스또이가 살던 시절, 20세기 초까지도 '미르'는  мiръмиръ, 이렇게 두 개로 나뉘어 있던 단어였다. 블라지미르 달(Владимир Даль ; Vladimir Dal') 의 '대러시아어 사전(1881)'에서 миръ는 동사 мирить (화해하다, 갈등, 증오 따위를 종식시키다)와 같은 어원의 단어로 되어있지만, мiръ는 '온 세상, 시공 속의 세상'등의 의미로 풀이되어 있다. 발음이 비슷한 이 두 단어는 결국 1918년의 철자법 개혁으로 인해 하나의 단어가 되어 현대 러시아어의 '미르'는 이 두 의미그룹을 모두 갖게 되었지만, 각각의 단어가 불러 일으켰던 관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똘스또이는 이 책의 제목을 뭐라고 썼을까.
1886년의 초판을 보면 분명히 '미르'의 자리에는 'миръ', 즉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때는 아직 두 단어가 통합되기 이전이니, 이것만 놓고 본다면 '전쟁과 평화'라는 의미가 맞다. 하지만 똘스또이가 계약 전에 출판사에 보낸 초판 원고에는 '전쟁'을, война й에서 위쪽의 반원 기호가 사라진 воина 라고 쓰고 있는 등 서두르다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실수가 있었다. 그 이후 출판사와 주고 받은 글에서 똘스또이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적을 때 '평화'라는 의미의 миръ 대신 '세상, 지상, 인간 세상'이라는 의미의 мiръ 로 바꾸어 적고 있다.

똘스또이와 출판사가 서둘러 출판 계약을 맺고 출판을 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제목을 변경하지 않은 채, 첫번째 원고에 적혀있던 제목대로 출판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거라는 추측이 많은 문학사가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그 무렵 례프 똘스또이가 출판을 위해 심하게 서두르다 자잘한 실수들을 저질렀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내용을 볼 때, 그리고 똘스또이의 성향을 볼 때 단순히 '전쟁의 부재'를 의미하는 '평화'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와 성찰을 담을 수 있는 단어 мiръ를 썼을 거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평화를 단순히 전쟁의 부재로, 혹은 전쟁을 평화의 부재로 보는 건 똘스또이식 사고방식이 아니었고, 똘스또이가 이해한 전쟁은 인간 세계의 모든 '태엽 장치'들이 교묘히 맞물려 돌아가는 그 어떤 현상, 매우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지만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어떤 상태 그 이상의 것이었다. 따라서 똘스또이가 '평화'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닌 두번째 의미의 '미르'를 사용했을 거라는 것이 문학 비평가들의 정설이다. 똘스또이의 이런 사상은 작품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제목에 대한 이런 혼동(?)은 계속되어 1913년 출판본에서는 1권이 시작되는 부분의 миръмiръ 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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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판 '전쟁과 평화', 1권 첫 페이지에 мiръ 라고 되어있다>



1917년, 같은 제목을 가진 마야꽆스끼의 장시가 출판되었다. 아직 철자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는데, 똘스또이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이 제목을 마야꽆스끼는 '평화'가 아닌 '세계'라는 의미의 '미르'를 사용하여 война и мiръ 라고 붙였다. 그 후 철자 개혁(1918)에 의해 두 의미 그룹의 '미르'는 하나의 단어로 통합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1965년에 마야꽆스끼의 이 장시를 번역 출판한 허버트 마샬(Herbert Marshall)이 그 제목을 "War and Peace"가 아닌 "War and Universe"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는 허버트 마샬이 마야꽆스끼의 1917년 초판으로 번역 원문을 삼았거나, 아니면 러시아어 단어 '미르'의 깊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영어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 결과일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1930년대인가 40년대인가에 이미 미국에서 영화 '전쟁과 평화'가 제작된 적이 있었던만큼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이 마샬에게도 더 익숙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러시아어 '미르'가 영어의 peace로 옮겨진 걸 알게 된 여러 학자들이 문제제기를 종종 하곤 했지만 거장의 유명한 대표작 제목을 바꿀만큼 공론화되지는 못하여, "전쟁와 평화"는 지금도 "전쟁과 평화"로 남아있다..


'평화'냐 '세계'냐의 갈등으로 자기 소설의 제목을 뒤섞어놨던 똘스또이의 고민은 결국 1918년 철자 개혁으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비록 작가 자신은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전쟁과 평화'- 느낌도 잘 정돈된 듯하고, 무엇보다도 두 단어의 서로 대립되는 의미가 일종의 긴장감내지는 비장함마저 느끼게 하는 제목이긴 하지만, '미르'가 '평화'로 옮겨질 때 잘려나가는 그 어떤 묵직함, 복잡한 이 세계를 대할 때 느끼는 어떤 깊이감, 인간과 그 사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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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례프 똘스또이 자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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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가디언 홈페이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고, 그 기사에 (당연히) 관심을 가진 러시아 언론에서도 이를 다루고 있다. 내용은 례프 똘스또이(러시아 문학에서 제법 명성을 얻은 '똘스또이'라는 이름의 작가 및 시인이  최소 3명이기 때문에, 귀찮더라도 가급적 이름을 덧붙이려고 한다)의 "전쟁과 평화" 영역본을 둘러싼 논쟁이다.

리차드 피비어(Richard Pevear)는 러시아인 부인 라리사 볼혼스까야(Лариса Волхонская ; Larisa Volkhonskaja)과 함께 활동하는 러시아 문학 전문 번역가라고 한다. 이들이 번역한 "안나 까레니나"는 오프라 윈프리의 추천 도서 목록에도 포함이 되어 미국에서만 80만부 이상이 팔려 미국 대중에게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선보인 좋은 케이스로 손꼽힌다. 물론 오랜 시간의 팀작업을 통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번역한 영역본이다. 이번에 이들이 "전쟁과 평화"를 번역하여 내놓았는데, 마침 영국의 번역가 앤드류 브롬필드(Andrew Bromfield)가 자신의 "전쟁과 평화" 영역본을  거의 동시에 낸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브롬필드의 번역본은 피비어의 1,267페이지짜리 번역본의 거의 절반인 886 페이지로 되어있고, 소설 끝부분에 어마어마한 양으로 들어있는 례프 똘스또이의 사색(똘스또이는 이 소설을 쓰며 가졌던 철학적인 사색들을 맨 마지막에 모아놓은 것으로 소설을 끝맺었다)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500여 인물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 귀족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이 작품속의 많은 인물들-물론 '조연급'-과 프랑스어(당시 러시아 귀족은 사교 생활에서 불어를 주로 사용했다) 부분, 그리고 작품 곳곳에 작가가 남기고 있는 철학적 이야기들이 모두 잘려 나갔다. 게.다.가. 결말이 바뀌어 안드레이 공작이 보로지노 전투에서 죽지 않는다!!! 는 일종의 해피엔딩.(사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결말이긴 하다;;;)

이런 번역본을 낸 출판사에서 "길이는 반으로, 재미는 두 배로..... 전쟁은 줄이고 평화는 늘렸다"는 식의 광고를 하자, 피비어가 이 출판사에 항의 서한을 보내 '러시아 문학에 대한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비판을 하면서 일이 불거졌다.


피비어는 브롬필드의 번역이 '똘스또이에 대한 몰이해, 러시아 문학에 대한 우롱의 결과'이고, 지극히 몰상식한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는데, 이에 대해 출판사는 피비어가 러시아어를 하지 못한다는 걸 들며 "피비어는 이 번역본이 '원본'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지만, 이 번역본은 엄연히 똘스또이가 기재했던 잡지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며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브롬필드 측의 이런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례프 똘스또이는 1865년에 잡지 "러시아 통보(Русский вестник; russkij vjestnik)을 통해 일련의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문학 연구가들 사이에서 "1805년"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도 2000년에 처음으로 정식 출판되긴 했었다. 이 작품은 "전쟁과 평화"의 초안격이었는데, 똘스또이는 3년 후 '줄거리 구상' 정도에 지나지 않던 이 작품을 완전히 바꾸어 "전쟁과 평화"로 내놓았다.

다만 브롬필드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초안본' 조차도 꼼꼼히 번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헐리우드식 스크린화를 위한 스토리라인'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초안에는 (나도 그 초안은 읽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줄거리가 들어있긴 한데, 브롬필드의 번역본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애정 이야기와 여러 음모들만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브롬필드 측에서는 이것이 똘스또이가 먼저 내놓은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비어의, 그리고 잘 알려져있는 "전쟁과 평화"보다도 이것이 더 '원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게 문제다.


이상이 지금까지 진행된 사건(?)의 개요이다.
본격적으로 삼천포를 향해 가자면...


*
8-9년 전에 갑자기 례프 똘스또이의 중편 소설들이 재번역되어 출판된 일이 있었다. 결혼, 행복 등의 제목을 달고 주로 불어 번역본으로부터 중역된 한권짜리 얄팍한 책들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들이 꽤 오랫동안 시내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었다.

러시아로 자유로이, 그리고 직접 유학을 갈 수 있게 된 것이 1988년 한소 수교 이후 1990년대 초반이었으니, 1998년 즈음은 초기 유학자들이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러시아 문학 재번역'(이전까지의 러시아 문학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영어, 불어, 일어 번역본에서 다시 번역한 중역본이었다) 붐은 아마 이런 시기와 맞물려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여하튼, '러시아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실제로도 그런 작업들이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불어 등에서 중역된 똘스또이의 중편 소설이 출판되고, 그것이 또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그 때 문학 수업에서 잠시 지나가는 얘기로 이 일을 다루었는데, 그 원인에 대해 대부분이 공감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들의 작품이 전세계의 많은 이들 -작가들을 포함하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나도 똘스또이를 읽었다' 혹은 나아가 '똘스또이를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서 뭔가 멋진 분위기를 좀 잡아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들의 유명 작품들이 워낙에 길어 읽기가 쉽지 않다보니 중편소설 하나쯤 읽고 '폼잡아보려는 게' 아니겠냐는 것. 혹은 최소한 한 작품은 읽었다는 일종의 자기 만족.


(덧붙여..
례프 똘스또이는 '종교적 변화'를 겪은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르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은 모두 그 이전에 나온 것이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이렇다할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우화들 혹은 '바보 이반 이야기'라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글을 읽고 대가의 작품을 읽었고, 알고 있다고 믿으며 똘스또이를 논하려 드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노 코멘트.)
 


학부에서 노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작품들을 모두 읽고 비평을 하며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외부인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니들 잘났다'할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나누며 스치던 표정들, 장난스런 그 말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짙게 깔리던 그 '공감'의 분위기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노문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줄곧 받아야 했던 '똘스또이 읽어보셨겠네요' '도스또옙스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같은 질문은 사실 학생들에게도 고역스런 일이었다.


*
주로 개론 수업시간에 이런 만행이 자행되곤 했는데, 두 세 작품을 한 달 정도 안에 읽고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죄와 벌 1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2권, 안나 까레니나 2권, 전쟁과 평화 4권 - 그것도 200페이지 남짓한 작은 사이즈가 아닌, 권당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그 묵직한 내용들-작가가 쉼없이 풀어놓는 철학적 화두들이 더해지면 이건 한달에 한권 읽기도  벅차다.

그래서 보고서 마감일이 다가오면 별별 일이 다 생기곤 했다. 안나 까레니나, 전쟁과 평화 처럼 몇번 영화화된 것은 영화를 보고 '떼운다'던가, 보고서 주제 제한이 느슨한 경우에는 온갖 '잔머리'를 굴려 다른 짧은 작품들과의 비교로 페이지수를 채운다던가, 심지어는 100 페이지 정도의, 글자 크기는 일반 책의 두배는 됨직한 중고생용 문고판을 읽는 일도 있었다. 다 읽은 누군가가 그 줄거리를 이야기해줄 때는 때아닌 강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노문학과 학생들이 모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것들이었지만, 그만큼 보고서에 짓눌리던 우리는 절박(;;;)했고, 도대체 왜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은 '짧고 단순한' 것이 갖는 아름다움을 모르냐며 거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랬으니, 체홉을 처음 대했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 후 전공을 바꿔, 보고서 주제 찾기의 부담감에서 해방되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해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 속에서 다시 그 작품들을 읽게 되면서부터 러시아 문학 작품들-특히 장편 소설들-에 대한 애착이 되살아나 대부분 여러번씩 다시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 가운데 내가 러시아어 원문으로 읽은 것은 죄와 벌 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발췌독이었다. 학부 전공에, 러시아 체류 5년 이상까지 더한다면 정말 부끄러운 기록이다.


*
개인적으로 번역 문학은 그 나라 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여기고 있다. 러시아 작가가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국어로 옮겨진 뒤에는 한국 (번역) 문학에 속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의 문학 번역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씁쓸함을 느낄 때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만 그 문학을 읽은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원본을 읽을 수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을 들여 최대한 질을 높힌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최상은 아니어도 최선일 것이다. 또한 어설픈 외국어 실력으로 사전 찾아 가며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잘 번역된 작품이 더 많은 감흥을 남길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
이전에 이윤기씨의 '변신 이야기' 번역 만행에 대해 끄적댄 것에도 했던 이야기지만,
원전이 아주 길다면, 작가가 그렇게 써놓은 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걸 보는 것 자체가 (즐겁든 지루하든 간에) 문학을 감상하는 것이다. 거기엔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없다.
읽고는 싶은데 길어서 싫다? 어불성설. 싫으면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 데에 다른 이유(멋을 부리고 싶다, 잘난체 하고 싶다 등등)가 곁들여지면 이미 그건 문학 감상이 아니다. 좋아서 읽는 것이고, 읽고 싶으니까 읽는 것이다. 그것이 길건 짧건 간에. 읽고 또 읽다가 영 지루하고 나와 안 맞으면 관두면 된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마음에도 없는 글에 시간을 낭비할까.


만일 "전쟁과 평화"를 영화로만 보았다면, 문고판, 축소판으로만 보았다면 그건 '례프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은 것이 결코 아니다. 'xxx 감독의 "전쟁과 평화"를 봤다' 아니면 "전쟁과 평화"의 줄거리를 안다' 일 뿐이다.
이런 축소판이 할 수 있는 일은 줄거리 요약 및 전달일 뿐인데, 이게 문학 감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라고 본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축소판인 경우, 최대한 많은 것들을 흡수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그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차후의 관심거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정말 읽고 싶은' 문학 작품을 고르는 데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그 작품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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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쟁과 평화" 번역본 논쟁에서 내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부분은 과연 "1805년"을 "전쟁과 평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물론 례프 똘스또이는 "1805년"을 잡지에 실었다. 하지만 3년 뒤 완전히 탈바꿈한 작품에 대해서만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똘스또이 스스로, 그리고 문학 연구가들이 말하듯 "1805년"은 "전쟁과 평화"의 초안인데, 이 초안이 작가의 서랍안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에 나온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이것이 '진짜'  "전쟁과 평화"라고 해도 되는 걸까.

러시아 방송에는 례프 똘스또이의 증손자이자 '야스나야 뽈랴나(똘스또이의 영지)' 박물관장인 블라지미르 똘스또이의 짧은 인터뷰가 있다.
"똘스또이의 텍스트를 삭제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초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우연히 다시 발견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작품을 완전히 다시 썼고, 그 제목으로 작품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Ecco사(브롬필드 번역본을 낸 출판사)의 설명 문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다.
"이 번역본의 목적은 작품 전체를 읽어보길 원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러시아 문학을 소개하고 접하게 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뭣하러 축소판을 800여 페이지 짜리로 내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분량인데..
-정말로 그게 목적이라면 왜 그 번역본이 '진짜' '원본' "전쟁과 평화"라고 우기십니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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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판 발행에 대한 "외국 문학"지의 편집국장 알렉산드르 리베르간뜨(Александр Ливергант ; Aljeksandr Livjergant)의 말 : "서구에서 축소판 발행은 널리 퍼진 관행입니다. 이건 문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저 상업적인 관행일 뿐입니다. 진정한 문학 번역가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기 때문이지요."

러시아에서도 축소판은 그리 낯설지 않다. 소련 시절에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검열로 인한 '축소'가 있었고, 이제는 상업적 목적으로 축소판들이 발행된다. 하지만 축소판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자는 어린 학생들 뿐이다. 자국 문학에 강한 애착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문학 교과서에는 상당량의 발췌문이 실려있다. 쉬꼴라(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그 작품들을 모두 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는 그런 발췌문을 중심으로 약간의 '맛보기'를 주로 하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모르고는 그런 '맛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줄거리 소개판본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를 통해 문학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될 학생들을 위해 각 학년별로 평균적인 이해력에 맞게끔 다양한 수준으로 재편집된 '학생용 문학전집'이 나와 있다. 실제로 이런 과정을 통해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던 한 친구는, 이런 학생용 전집을 학년이 바뀔 때마다, 이해력이 높아질 때마다 따라가다보면 20대 초중반쯤엔 원본을 그대로 읽게 된다고 했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우리나라, 그리고 서구에서 막대한 분량의 러시아 문학을 마구잡이로 우겨넣어 성인들을 대상으로 찍어내는 축소판과는 판이하게 다른 게 아닐까.


*
브롬필드는 오래 활동해온 러시아 문학 번역가라고 한다. 그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과 평화"의 초안본을 번역하고 싶어했던 그의 열망을 출판사 Ecco에서 이용해먹고 있는 걸까.
왜 이 설전속에 브롬필드가 직접 나서서 한 이야기는 없을까. 좀더 지켜보면 언론에서 계속 보도를 해주려나..

 


"1805년"을 진짜 "전쟁과 평화"라고 우기고, 그러면서 그것조차 제대로 옮기지 않은 Ecco 출판사는 이번 논쟁으로 인해 오히려 책의 선전 효과가 증가하고 있는 걸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는 얘기가 씁쓸하다.





주 관련기사 :

http://books.guardian.co.uk/news/articles/0,,2196489,00.html
http://news.ntv.ru/119213/ (이 4분 남짓의 뉴스에는 짧게나마 례프 똘스또이의 산책 모습이 나온다)


(2007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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